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이 박물관은 싱가포르의 여사와 문화를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1887년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이다.
한국어 무료 가이드 투어는 매달 2번째 주 목요일 11시 30분에 있다.
외국안 학생 입장권 - 7S$


SINGAPURA
- 지질학에서는 고생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있다.
- 선사시대 도구들로부터 수천년 전에 이곳 정착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 싱가포르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14세기 "번성한 항구"라고 한다.
- 중국 무역업자는 단막시(테마식 또는 테마섹)이라고 불렸고 세자라 멜라유(말레이실록)에는 '싱가푸라'라고 불렸다.
- '싱가푸라'는 작지만 무역과 정치로 말레이 군도 뿐만아니라 태국, 중국, 인도와 연결 되어있다.
- 토착민(오랑 셀레타, 오랑 라우트)가 존재했다.
- 14세기 후반에 외국 침략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The Singapore Stone
이 돌은 10세기에서 14세기로 카위문자로 쓰여 있고 산스크리트어 단어들이 포함하고 있지만, 이것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싱가포르 강 하구에 있는 사암 바위이다.
영국은 군사 기지를 짓기 위해 이 바위를 폭파시겼다. 싱가포르에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고 다른 두 조각은 정확한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Blue-and-white porcelain(청백자)
14th century, North bank of the Singapore River
These sherds are some of the first ceramics to be made using cobalt blue decoration. Singapore was one of the first places in the world to acquire this type of pottery. The designs were simple, mainly scrolls, florwers, leaves, duck and water weeds.
이 조각들은 코발트 블루 장식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도자기들 중 일부이다
싱가포르는 이러한 종류의 도자기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얻은 곳 중 하나이다.
디자인은 주로 두루마리, 꽃, 잎 오리, 물초로 단순했다.
Sejarah Melayu(The Malay Annals)
19th century
The Sefarah Melayu is a chronicle of the Malay courts of Singapore and Melaka from the 14th to 16th centuries. It remains a fundamental text of Malay history today. The oldset known version was compiled in 1612 by Tun Sri Lanang, a count offcial at the capital of the Johor sultanate. Most existing manuscripts of the Sijarah Melayu data from the 19th century.
세자라 멜라유는 14세기부터 16세까지 싱가포르와 멜라카의 말레이 궁전에 대한 연대기이다.
오늘날 말레이 역사의 근본적인 문자로 남아있다. 현존하는 세자라 멜라유는 19세기에 필사본이다.

The Coming of the Europeans
1511년, 멜라카는 수익성이 좋은 향신료 무역 때문에 동남아시아로 확장하고 있던
포루투갈인에게 남어갔다. 이것은 이 지역의 유럽식민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포루투갈 소식통에 따르면 1600년대 초에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사반다르(항구주인)가 있었다고 한다.
17세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했다. 그 후 2세기에 걸처 무역을 통제하기위해 포르투갈, 말레이시아 아체네스, 부기스와 싸웠다.

CROWN COLONY
-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 경과 윌리엄 파라르 소령이 말레이 술탄과 거래를 맺었다.
- "모든 국가의 배와 선박에 의무 없이 개방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국제 무역항으로 개발하였으며, 1850년대까지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의 무역 중심지이었다.
- 1867년부터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 인구는 말레이 군도, 중국 및 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A free port to "destroy the spell of Dutch monoply"
영국의 자유항 개설은 극적인 변화를 촉발시켰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5년 만에 1만 명 이상으로 늘었고, 서쪽의 델록아이어에서 동쪽에 칼랑에 이르는 항구는 말레이 군도, 아시아, 유럽의 배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인도에서 천과 아편 같은 화물, 중국에서
비단, 차와 동자기를 가져왔고, 향신료, 진구 등과 같은 해협 생산물을 가져왔다.

1819년 영국이 무역항을 설립했을 때,
이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들은 약 20개의 도박장을 가지고 있었다.
1830년때까지 섬 내부를 가로지르는 약 350개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중국의 이주 농부들은 갬비어와 후추를 좋아 했는데, 이 작물들은 빠른 수익을 창출하고 재배에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he Padang in Singapore
This painting depicts the Padang (open square of field) as a centre of social life. It creates the impression that Singapore was an idyllic multicultural society. However, the representation of Europeans on an elevated plane - on horseback of in horse-drawn carriges - while Asisns are either standing or seated on the field, subtly suggests that it was the Europeans who held the authority in the sttlement.
이 그림은 파당(열린 광장 또는 들판)을 사회생활의 중심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싱가포르가 목가적인 다문화 사회였다는 인상을 만든다.
그러나 아시아니들이 서있거나 들판에 앉아 있는 동안, 말위에 또는 말을 끄는 마차 위에 있는 유럽인들의 표현은 정착지에서 권위를 가졌던 것이 유럽인들이었다는 것을 미묘하게 암시한다.

Convicts from British India - The men who builr the town
From 1825 to 1873, colonial adminstrators transported convicts from India to Singapore as cheeap labour to build the port town. By the 1850s, there were about 3,000 convicts here, mostly from the Madras, Bengal and Bombay presidencies of British India, and the island of Ceylon.
Trained in European construction methods, the convicts built roads and filled in the swampy land around the Singapore River to build Commercial Square (present-day Reffles Place) and Collyer Quay.
They also constructed many buidings in the European town, such as
St Andrew's Cathedral, Government House (now the lstana) and Fort Canning.
1825년부터 1873년까지 식민지 관리자들은 항구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으로 죄수들을 인도에서 싱가포르로 운송했다. 1850년대까지 이곳에는 주로 영국령 인도 마드라스, 뱅갈, 봄베이 대통령제와 실론 섬 출신의
약 3,000명의 죄수가 있었다.
유럽의 건설 방법 훈련을 받은 죄수들은 싱가포르 강 주변의 늪지대에 도로를
건설하고 상업광장과 콜리어 콰이를 건설했다. 또한 유럽 마을에
성 안드레 대성당, 정부청사, 포트캐닝과 같은 많은 건물들을 지었다.

Opium Smokers
싱가포르에서 1900년대에는 아편 흡연이 흔했으며, 합법적으로 판매되어 550개의 아편 가게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피로를 가리기 위해 아편을 사용하여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쿨리들은 매일 약 3훈(35그램)의 정제 아편을 소비했고,
인력거 끄는 사람들은 그 두 배를 소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중독으로 이어졌고, 식민 정부는 1908년에 이를 문제로 인식했다.
그러나 아편은 큰 사업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Carl Trocki는 아편 없이는 "영국 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식민 통치의 첫 세기 동안 정부 수입의 40~60%가 아편 판매 허가에서 나왔고, 상인들은 아편으로 번 돈을 은행, 보험, 증기선 사업에 투자했다.


SYONAN-TO
- 제2차 세계대전 시작 전에 영국은 해군기지를 설립하고, 15인치 큰 해안포를 설치했다.
- 1937년 2차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싱가포르의 중국인 공동체는 일본 불매운동과 중국의 전쟁기금을 모았다.
- 1941년 12월 80일, 일본은 영국을 이기고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 여국은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하고 일본은 SYONAN-TO로 명명하였다.
-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했을 떄 점령이 끝났다.



Type 95 Ha Go Japanese tank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가장 흔한 일본 전차이다. 1935년에 도입된 이 경전차는 미쓰비시 디젤 엔진이 장착되었고 37mm총과 두개의 7.7mm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난 탱크는 1941년에 연합군 경전차와 경쟁할 수도 있었다.
말라야와 태평양 전쟁에서 기동되었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이 탱크들은 영국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일본군이 싱가포르 북부에 처음 상륙한 지 며칠 만에 부킷 티마에 도착했다.

SINGAPORE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 시작했다.
- 민주적인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헌법 개혁을 도입하고 1959년 완전히 선출된 정부를 위한 첫 번째 총선이 열렸다.
- PAP당 리관유는 싱가포르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다.
-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와의 합병과 분리를 통해 완전히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 그 후 20년간 PAP 정부는 산업화를 도입하고 외국인 투자와 관광을 장려하고, 현대적인 공공 주택과 교육을 제공하고 환경을 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Mace of the City of Singapore
The silver figures of a Chinese, Malay, lidian and European, linked by a grland of flowers, symboilse Singapore's multi-ethnic population, They stand atop a castle bearing the City's Arms. Other motifs reference Singapore's ecology, culture and trade.



산업화 초기 몇 년 동안, 싱가포르는 국민의 일자리 창출하기 위해 모든 유형의 산업을 환영했다.
1960년대에 공장은 주롱, 레드힐 등를 포함한 싱가포르 전역의 산업 단지에 빠르게 연속적으로
지어졌다. 모기 코일, 양초, 분필을 만들었다.
HDB는 Housing and Development Board의 약자로, 싱가포르의 공공 주택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다. HDB 주택은 싱가포르 인구의 약 80%가 거주하는 주요 주거 형태로, 정부가 공급하고
관리하는 공공 아파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HDB 주방은 실제 가정과 광고와 잡지에
묘사된 공간이다. 여기에 전시된 많은 가전제품은 한때 싱가포르 가족의 소유물이다.
첫 번째 가전제품은 밥솥과 믹서와 같은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싱가표르 교환학생 >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가포르 페라나칸 박물관 (3) | 2024.10.30 |
---|---|
싱가포르 리틀 인디아 인도 문화유산 박물관 (8) | 2024.10.29 |
[싱가포르 교환학생] 싱가포르 버블티 & 주스 탐방 (0) | 2024.10.27 |
[싱가포르 교환학생] 잘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 in 준비물 (0) | 2024.05.20 |
[싱가포르 교환학생] 생활하면서 많이 쓰는 카드 & 앱 (0) | 2024.05.19 |